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카우츠키 (문단 편집) == 생애 == [[185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의 [[체코인|체코계]] [[오스트리아인]] 중산층 예술가 가정에서 출생했다. 이후 [[빈(오스트리아)|빈]]으로 이주하여 [[빈 대학교]]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이 시기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한편 공산주의의 대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도 교류한다. 엥겔스와 교류 과정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유작이었던 《잉여 가치론》(''Theorien über den Mehrwert'')을 편집하며 카우츠키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1891년에는 [[아우구스트 베벨]],[* [[독일 사민당]]의 창당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함께 [[독일 사민당|사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을 작성하면서 당내 최고의 이론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지위는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하면서 더욱 확고부동하게 됐으며, [[1890년대]] 후반에는 스승이었던 베른슈타인이 [[민족주의]] 성향이 가미된 이른바 [[수정주의]]를 제창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중심 혁명 이론에 비판을 가하자 이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즉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계급]]도 계급이지만 독일 민족도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이를 '전제 봉건적 [[차르]]에 대한 성전'으로 규정하고 찬성 입장을 보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반전적 성향으로 돌아섰고, 1917년에는 아예 사민당에서 탈당한다. [[독일 혁명]] 이후 다시 사민당에 복당한 카우츠키는 1920년대 [[러시아 혁명]]의 본질을 놓고 [[블라디미르 레닌|레닌]],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등 고령의 나이에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해나간다.[* 카우츠키는 폭력이 가미된 러시아 혁명에 별로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며, 또한 혁명 이후 소수의 볼셰비키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물론 레닌도 그를 혁명을 이룰 생각이 없는 계급배반자라며 신랄하게 깠다.] 하지만 1938년 [[나치]]가 [[안슐루스|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망명을 떠나야만 했고 그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난다. 카우츠키 본인은 나치의 탄압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러지 못해서 아들이었던 베네딕트 카우츠키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7년 동안 수감됐으며 아내 루이제는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